[사물 제안서 #010] 무릎을 꿇어야 허락되는 전력, 소외된 콘센트의 위치와 그 비굴한 접근성에 대하여

  [사물 제안서 #010] 무릎을 꿇어야 허락되는 전력, 소외된 콘센트의 위치와 그 비굴한 접근성에 대하여 노트북 배터리가 5% 남았다는 경고등이 깜빡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책상 밑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몸을 구부린다. 전력을 공급받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고, 먼지 뭉치가 굴러다니는 바닥 깊숙한 곳으로 손을 뻗어야 한다. 보이지도 않는 콘센트 구멍을 손가락 끝의 감각만으로 더듬으며, 나는 오늘도 … Read more

[사물 제안서 #009] 배달의 기쁨을 앗아가는 비닐 랩과 조잡한 플라스틱 칼의 처절한 사투

  [사물 제안서 #009] 배달의 기쁨을 앗아가는 비닐 랩과 조잡한 플라스틱 칼의 처절한 사투 금요일 저녁, 긴 일주일의 보상으로 떡볶이를 시켰다. 현관문 앞에 놓인 묵직한 봉투를 들고 올 때까지만 해도 내 심장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식탁에 앉아 봉투를 열고 메인 용기를 마주하는 순간, 그 설렘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용기 입구를 지독하리만큼 꽉 움켜쥐고 있는 투명한 비닐 … Read more

[사물 제안서 #008] 정성껏 빤 빨래에서 나는 쉰내, 베란다 건조대의 환기 실종 사건

  [사물 제안서 #008] 정성껏 빤 빨래에서 나는 쉰내, 베란다 건조대의 환기 실종 사건 주말 아침, 햇살이 좋아 밀린 빨래를 했다. 섬유유연제의 향긋한 냄새를 맡으며 베란다 천장에 달린 건조대를 내렸다. 좁은 간격 사이에 수건과 옷들을 겹겹이 널고 다시 천장으로 올렸다. 하지만 저녁이 되어 베란다 문을 열었을 때 나를 맞이한 건 상쾌함이 아니었다. 눅눅하고 무거운 공기, … Read more

[사물 제안서 #007] 갈증보다 먼저 찾아온 통증, 음료병 알루미늄 캡의 날카로운 배신

[사물 제안서 #007] 갈증보다 먼저 찾아온 통증, 음료병 알루미늄 캡의 날카로운 배신 목이 타는 듯한 갈증에 편의점에서 작은 유리병에 든 비타민 음료를 집어 들었다. 시원한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상상을 하며 뚜껑을 잡고 힘차게 돌렸다. 하지만 들려야 할 경쾌한 ‘드르륵’ 소리 대신, 내 검지 손가락 끝에는 날카로운 금속의 감촉과 함께 뜨거운 통증이 먼저 찾아왔다. 알루미늄 … Read more

[사물 제안서 #006] 뜯는 곳이라는 거짓말과 과자 봉지의 폭력적인 개봉 방식에 대하여

[사물 제안서 #006] 뜯는 곳이라는 거짓말과 과자 봉지의 폭력적인 개봉 방식에 대하여 캄캄한 밤, 고요한 거실에서 조심스럽게 과자 봉지를 집어 든다. 가족들이 깰까 봐 숨을 죽이고, 봉지 상단에 친절하게 인쇄된 뜯는 곳이라는 화살표를 찾는다. 양손에 힘을 주고 그 지점을 공략하지만, 결과는 늘 참담하다. 봉지는 찢어지는 대신 질기게 늘어날 뿐이고, 더 큰 힘을 주는 순간 봉지는 … Read more

[사물 제안서 #005] 옆 칸을 침범하는 이기적인 어댑터와 멀티탭의 공간 독점에 대하여

[사물 제안서 #005] 옆 칸을 침범하는 이기적인 어댑터와 멀티탭의 공간 독점에 대하여 어두운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무릎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고요한 밤이다. 새로 산 모니터의 전원을 연결하려는데, 6구짜리 멀티탭은 이미 포화 상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구멍은 세 개나 비어 있었지만 내가 꽂을 수 있는 자리는 단 하나도 없었다.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 Read more

[사물 제안서 #004] 내 척추를 구부정하게 만든 싱크대 높이와 수전의 소외된 거리감에 대하여

저녁 식사를 마치고 쌓인 그릇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심호흡을 한다. 설거지 자체가 싫은 게 아니다. 단 15분, 그 짧은 시간 동안 싱크대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내 요추 4번과 5번 사이가 비명을 지르기 때문이다. 2026년이라는 최첨단 시대를 살고 있지만, 우리 주방의 표준은 여전히 수십 년 전의 평균 신장에 머물러 있다. 내 허리가 굽어가는 건 세월 … Read more

[사물 제안서 #003] 내 손톱과 인내심을 앗아간 간장 뚜껑의 가학적 설계에 대하여

주방은 평화로운 곳이어야 한다. 하지만 어제 저녁, 불고기 양념을 만들려던 나는 작은 플라스틱 조각 하나 앞에서 무너졌다. 새로 산 간장병의 뚜껑을 여는 그 짧은 순간, 내 엄지손톱 끝은 하얗게 들떴고 날카로운 플라스틱 고리는 무심하게도 툭 끊어져 버렸다. 뚜껑 속의 속마개는 여전히 굳건히 닫힌 채 나를 비웃고 있었다. 결국 나는 요리를 멈추고 가위를 가져와 그 마개를 … Read more

[사물 제안서 #002] 비누를 질척이는 슬라임으로 타락시키는 받침대의 설계 오류

어느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새로 산 수제 비누의 은은한 향기를 기대하며 욕실 문을 열었을 때, 나를 맞이한 건 상쾌함이 아니라 지독한 불쾌함이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단단하고 매끄러웠던 비누가, 받침대 바닥에 찰떡처럼 눌어붙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괴생명체가 되어 있었다. 비누를 집어 드는 순간 ‘찌익’ 소리를 내며 늘어나는 그 투명하고 끈적한 점액질, 이른바 비누 콧물을 마주할 … Read more

[사물 제안서 #001] 밤마다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충전 케이블의 비극과 재설계

새벽 2시 15분. 사방이 고요한 방 안에서 들리는 건 내 얕은 숨소리와 창밖의 먼 차 소리뿐이다. 졸린 눈을 비비며 머리맡에 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은 여전히 어두컴컴하다. 어제 분명히 꽂아둔 충전 케이블이 범인이었다. 선을 살짝 건드리자 그제야 ‘띠링’ 소리를 내며 충전 표시가 뜬다. 하지만 손을 떼는 순간 다시 화면은 암전된다. 나는 다시 그 지옥 같은 … Read more